구상희-흘러내리는 물감의 생애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2024
구상희의 작업은 물감 자체가 스스로 독립되어 외화 된 결과물이다. 물감은 무엇인가를 지시하거나 표상하지 않고 균질한 몸통, 면적을 지닌 채 이어지면서 수직으로 흘러내리다 응고되어 버린 결과일 뿐이다. 이처럼 지시대상에서 자유롭고 화면구성의 관습에서 벗어나 물감 스스로가 자발적인 자기 생을 찾아가는 여러 여정을 우리는 현대미술에서 쉽게 목도하고 있다. 대부분의 작업들은 전통적인 캔버스 표면에 물감의 물리적 현존을 각기 다양한 방법론을 동원해 연출하고 있다. 캔버스는 그러한 물질이 담기는 용기의 역할을 하거나 물질의 여러 표정이 안착되는 최소한의 지지대로 머문다. 구상희의 작업 또한 물감 자체만을 제시하고 있다. 동시에 그 지지대조차 시선에서 망각/유실시킨다. 그런 상태에서 일정한 물감의 다발이 스스로 화면이 되고 색채의 그러데이션을 연출하면서 독립된 사물 그 자체가 되어 서 있다는 점이 특이하다. 다시말해 기존 회화에서의 바탕 면과 작가의 신체적 접촉으로 인한 효과나 관계가 여기서는 상당히 약화되어있다. 거의 부재하다. 회화적 표면은 사라지고 대신 컬러바를 연상시키는 각종 색채를 거느린 물감의 물리적 상태 그 자체가 그림이 되었는데 이것이 시각적 이미지에 해당하는 동시에 조각적인 실체로서 응결되어 자립한다. 전적으로 피부에서만 시각적인 환영이 일어나는 이 그림은 세로로 좁고 긴, 비교적 균질하면서도 차이를 간직한 물감의 병렬로 채워진다. 이 물감의 진로는 상당히 빠르고 확고한 붓질/서체적인 필력을 연상시켜주면서 질주한다. 기계적인 물감의 배열 안에 깃든 아날로그적인 표식이다. 나는 이 획/선이 물감의 물질성을 운반하고 제시하는데 효과적으로 작동하는 지점이 흥미롭다. 그림의 시작과 끝이 한 선에서, 물감의 지나간 경로에서 확고하게 규정된다. 그리고 화면 구성에 편입된, 의도된 표현적인 선은 아니지만 일정한 속도, 시간을 머금고 지나가는, 하강하는 선은 여전히 붓질(몸짓과 감정)을 보여주는 의미 있는 시도를 지닌 것이라고 생각된다. 분명 이 작업은 회화공간이 외부적인 어떤 것으로만 단호하게 제시되어 있다. 특정 이미지나 재현하는 대상이 부재하고 무엇인가를 표상하고 있지도 않다. 그러나 다양한 색채들로 채워진 이 ‘컬러바’는 색으로 환기되는 여러 감정을 부단히 환기시키는 편이다. 여전히 사각에 호소하는 그림이다. 일종의 이 색띠 그림은 하나하나 계속해서 나타나는 질서, 물감의 질서를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이 모종의 형태shape가 되고 색, 물질 모두와 하나가 되었다. 그림을 만드는 재료 이외의 것으로 파악되기를 거부하고 순수한 물감, 물감의 연쇄가 만드는 순수한 형태 그 자체만이 목적인 작업이다. 동시에 중력의 힘으로 스스로 형태를 찾아가는 물질성을 강조함으로써 시간의 흐름 자체를 드러내기도 하는 작업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물감의 배열을 이루는 획/선의 맛이 여전히 최소한의 회화성을 간직하는 보루처럼 자리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우리가 구상희 작가의 그림을 온전히 보기 위해서는 우선 전통적인 캔버스 작업에서 이루어지는 관습적인 피부의 효과를 배제해야 한다. 이미지나 붓질, 형상과 배경의 관계 등이 여기서는 가능한 의도적으로 지워진다. 그저 묽고 무거운 물감들이 자기에게 주어진 길을 묵묵히 수행하듯이 바닥을 향해 흘러내릴 뿐이다. 여기에는 작가의 의지와 자연법칙이 공존한다. 생각해 보면 이 그림에서 물감들은 전적으로 수직으로 하강한다. 그것은 지표를 향한 길이고 중력에 순응하는 일이며 인간의 의지가 아니라 대지의 본성에 결박되는 일이다. 직립한 인간의 수직에 대한 동경이 무너지고 그 자리에 서 있는 모든 것들을 종내 수평으로 무너지게 하려는 의도적인 그리기, 칠하기다. (그래서 근작에는 부분적으로 뜯겨진/의도적으로 절취해 놓은 화면이 전시장 바닥에 처연하게 놓이는 연출을 볼 수 있다.) 이 작업에서 지향하는 수평성이 지닌 의미는 중요해 보인다.
화려한 색채를 지닌 물질의 연출이 돋보이는 작가의 작업은 가능한 인위적인 회화적 행위, 신체적 행위 자체를 증발시키고 현실계의 물리적 법칙이 우선적으로 강하게 작동되는, 이를 강화하는 현상과 조우하게 한다. 작업의 공정 자체는 다소 차갑고 기계적인 구성에 견인되는 편인데 다만 화면의 하단에 응결된 물감의 흘러내릴 듯한 긴장감이 그러한 성질을 순간 깨버린다. 여기에 다분히 양가적인 속성, 이원적인 대립 구도가 이 작업에 개입되어 있다. 바닥 면에 매달린, 굳어있는 물감의 상태는 화면에서 내려오는 수직의 물감들과는 다른 몸으로 어느 종결의 지점을 지시한다. 다소 뾰족해진 물감은 그곳까지의 여정을 서둘러 마감하고 자기 몸을 마무리하는데 그것이 하나의 점으로 환원된다. 결국 작가는 물감의 상태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그리고 이를 동시에 보여준다. 수직의 균질한 몸통을 지닌 물감과 하나의 점으로 수렴되어 날카로워진 물감! 하나는 표면에 붙어있고 다른 하나는 모서리/화면 하단의 경계면에서 서식한다. 물감을 제시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지지대가 요구된다. 전통적인 캔버스거나 나무 박스 등이 필요할 것이다. 작가는 일정한 두께, 측면의 면적이 어느 정도 확보되는 틀을 만든 후 그 틀의 상단부위에서부터 물감을 균질하게 흘러내리도록 조성했는데 이는 마치 단호한 한 획처럼 속도감과 힘을 동반하면서 마감되고 있다. 일정한 압력에 의해 유출되는 듯이 물감을 밀리고, 칠해지면서 수직으로 질주한다. 그것은 화면의 맨 바닥에서 멈춘다. 근작에서는 물감이 한 단계 머물러서 다시 흐르도록 화면 하단에 단을 만들어 부착했다, 또한 두 개의 화면을 경첩처럼 화면을 잇대어 좌·우측 벽면 모두에 걸쳐있는 화면을 설정하거나 화면의 일부를 제거해서 화면과 비어있는 공간으로 들어온 벽을 동시에 바라보게 했다. 화면과 외부 공간과의 접속 지대를 늘리거나 그 둘이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음을 의도적으로 보여주는 전략이다. 물감은 경계에서 더는 바깥으로 흘러넘치지 못하고, 밀고 나가지도 못하고 머물고 만다. 밀려난 마무리를 흡사 겨울날 처마에 매달린 고드름처럼 보여주고 만다. 물감의 잔여분이 모서리에 매달려있는 것이다. 그러니 물감/색은 화면의 물리적 공간 안에서만 의미를 지닌다. 그 바깥은 회화가 자립할 수 없는 곳이다. 모든 물감은 주어진 사각형의 화면 안에서 자기 생을 마친다. 회화는 화면 바깥에서 결코 존재할 수 없다. 반면 구상희의 작업은 화면의 바깥을 부단히 모색하는 동시에 그 접점에서, 경계에서 사는 물감, 회화의 존재를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이 작가의 그림에 결정적인 요소는 전통적이고 관습적인 화면 자체를 들어내는 일, 물감이 화면 자체를 이루면서 전적으로 현상적인 측면을 노정하는 일, 물감에 개입하는 시간과 속도, 중력 등으로 최종적인 결과물을 도출하는 일, 가시적인 영역으로 정면 만이 아니라 화면의 좌·우측 면 모두를 회화적 공간으로 제공해주는 일, 그리고 작업이 걸리는 전시 공간 전체를 숙주 삼아 기생해나가는 전략을 펼치면서 벽면과 밀접한 공생 관계를 도모하는 일 등으로 요약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점들이 근작에서 엿보이는 이 작가 작업의 요체이자 이전 작업에서 더 밀고 나간 결과라는 생각이다.